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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작
차가운 겨울 밤 책상에 앉아 알랭 드 보통을 만나던 중 갑자기 이국에서 겨울 휴가를 보내고자 하는 충동이 생겼다. 그리고 몇 일 지나지 않아 나는 터키에 관한 론리 플래닛과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행에 필요한 배낭과 몇 가지 물품을 더 구입하였다. 여행의 즐거움은 떠난 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늑한 호텔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도를 보며 여정을 짜고 그 곳의 날씨, 문화, 교통 등을 알아 보며 일상이라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기쁨, 다시 말하면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아직 집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지만 여행은 이미 시작 된 것이다.



두바이 공항에서
이른 새벽 두바이에 도착하여 곧장 환승 장소로 가야하는 규칙을 무시한 채 택시를 타고 잠시 외출을 다녀왔다. 터키행 비행기 탑승 까지는 2시간이 남아 있고, 나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항 한 구석에 앉아 어느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다. 한 겨울에 불어오는 따뜻한 아라비아 사막의 바람, 이슬람 복장과 건축 양식은 충분히 이국적이였고,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나에게 만족감을 주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낯선 장소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라 이번 여행으로 기쁨을 느끼는 장소와 시간은 잠시 동안 일 뿐이며, 다시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초조함이였다.



여행의 기록 - 사진
무엇 때문에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내 얼굴도 나오지 않는 사진을 찍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답한다. 첫째, 좀 더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다. 같은 장소에 있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서서 구경하는 사람과 뷰파인더를 통해 구도를 잡고 포커스를 맞추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서로 보이는게 다르다. 공간의 가장 멋진 부분을 찾고, 주변의 조화를 생각한다. 평범한 장면에서도 무엇인가 매력을 찾고자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숨은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19세기의 인상파 화가 피사로(Camillo Pissarro)의 말에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Blessed are they who see beautiful things in humble places where other people see nothing.”
- Camille Pissarro

사진을 찍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록을 위함이다. 여행 장소의 대부분은 다시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여행 중에 느낀 그날의 감정은 훗날 같은 장소를 다시 찾는다고 해서 결코 같지는 않을 것이다. 기록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 캠코더로 소리와 영상을 담는 것, 지금 느끼는 감정을 글로 쓰는 것 등에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게으른 성격과 고상한 방식의 기록에 재주가 없는 나는 사진을 택하였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때의 사진을 보며 추억을 상기하고, 오래 간직하게 함으로서 지금의 여행을 보다 소중하게 한다.



카파도키아의 아침
이른 아침 괴뢰메에서 서광이 비추는 바위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편안함이었다. 추운 겨울 바람, 건조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주변 환경이 사전적 의미로 편하고 걱정이 없음을 뜻하는 편안함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는게 다소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이나 어렸을 적 부모님 처럼 사람은 자신이 커다란 존재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으로 부터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낀다. 그 때 나 역시 혼자였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양에 가까울 수록 눈부신 파란 하늘 아래로 모양과 위치에 따라 회색과 붉은 색이 뒤섞여 있는 구름, 드넓은 대지에 당당하게 솟아 있는 바위들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이토록 장엄한 모습 앞에서 아무리 자신을 과시하려 할지라도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될 것을 알기에 겸손함을 배운다.



이국의 밤 거리를 걸으며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이국의 밤 거리를 혼자 걸었다. 술에 취해 약간은 환각상태에 빠져서 낯선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지난날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후회를 하면서, 그리고 앞날을 상상하며 무언가 특별한 인생을 꿈꾸어 본다. 잠시 후 한겨울에도 추위가 기세를 떨치지 못하는 따스한 에게해의 바람을 맞으며 술과 노래를 즐기는 젊은이들,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 여유있게 휴식을 취하는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구 반 바퀴 떨어진 곳에서도 고향처럼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인생도 결국엔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해 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서
2009년 12월 31일 해가 바뀌는 시간의 경계에 거의 근접했을 때 나는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 짓는 공간의 경계, 보스포러스 해엽을 따라 유람선을 탔다. 인간이 정해놓은 지역의 이름일 뿐이지만 숫자뿐인 20대와 30대가 다르게 느껴지듯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 왼쪽과 오른쪽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배에서 내린 나는 좀 더 바다를 보고 싶어졌고, 이스탄불의 많은 볼거리를 제쳐두고 해변을 걸으며 스스로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태양이 부서지는 파도에 반사되어 눈 속으로 들어올 때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처 지나갔다. 계획했던 것과 똑같은 삶을 살기는 어려워도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소소한 즐거움 또한 인생의 소중한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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